소년의 일상에서 만난 좀머씨
요즈음 직장에서 새로운 일을 맡게 되면서 일은 조금 바빠졌지만 여가 시간에 여유를 갖고 제 마음을 챙기고 싶은 바램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재테크 책을 잠시 놓고 예전에 읽었던 좋은 책들을 다시 꺼내보고 있는데 그 즐거움이 꽤 큰 편입니다. 오랜만에 꺼내든 책은 제목이 <좀머씨 이야기>이지만 내용의 화자는 한 소년입니다. 소년의 일상은 우리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합니다. 소년의 성장기 속 좀머씨는 한결 같은 모습으로 온 동네를 쉬지 않고 걸어 다닙니다. 좀머씨 모습 자체는 쉬지 않고 걷는 모습으로 인생의 무게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소년의 삶 안에서 소년의 눈을 통해 그려진 그의 모습은 그저 기이하고 엉뚱한 아저씨일 뿐입니다.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소년의 생활이 귀엽게 보이지만 진지한 일상으로 더 무게 있게 와 닿고 좀머씨의 모습은 삽화에서처럼 지나칠 만한 배경일 뿐이게 됩니다.
책이 두껍지 않아서 금방 읽을 수 있기도 하며 꼬마 니콜라로 유명한 장자크 상페의 아기자기한 삽화가 눈길을 끕니다. 그림을 보면 넓은 들판을 걷는 좀머씨의 모습은 작은 점과 같습니다. 삽화에서처럼 우리는 책을 통해 소년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지만 좀머씨 이야기는 소년의 눈을 통한 모습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좀머씨가 세상을 등지고 계속 걸어다니는 사연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렇게 소년의 일상은 현실감 있게 좀머씨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선 상상력을 갖고 바라보게 됩니다.
모두의 어린 시절
물론 소년의 삶에 대해 큰 공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 특히 피아노 건반 위의 코딱지 사건은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소년이 연습을 안하고 피아노를 치러 갔다가 선생님에게 계속 해서 꾸중을 듣습니다. 선생님이 코를 훔치며 야단을 치던 중 선생님의 코딱지가 소년이 눌러야 할 건반 위에 떨어졌습니다. 틀리게 쳐야 하나 코딱지가 있지만 똑바로 눌러야 하나 엄청난 고민 뒤에 소년은 그 건반을 누르지 못하고 선생님의 화가 폭발합니다. 저는 정말 많이 웃으면서 이 장면을 읽었지만 주인공인 소년에게 이 일은 부당함을 겪게 한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독자로서 웃기지만 소년의 억울함도 타당하게 느껴지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기억에 남는 어린 시절이 있고 각자의 관점에서 특정 사건이 큰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소년의 코딱지 사건도 단순히 웃어 넘기기엔 소년 자신에게는 큰 의미입니다. 눌러야 할 건반 위에 선생님의 코딱지가 떨어진 것은 소년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건반을 누르지 못하고 혼나야 했던 소년의 마음이 어땠을까 헤아릴 수 있습니다. 한편 소년이 짝사랑 하던 여자 아이와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을 했지만 그 친구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일도 있었습니다. 이때 느꼈을 실망감을 과연 아무 것도 아니라고 가벼이 여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모두의 어린 시절이 책의 내용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기뻐하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희망하며 성장기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정처 없이 걷는다는 것
"그러니 제발 나를 좀 그냥 놔두시오!"
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날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과 함께 차를 타고 지나가다 길을 걷고 있는 좀머씨를 발견합니다. 좀머씨를 도우려 말을 거는 소년의 아버지에게 좀머씨는 제발 나를 가만히 놔두라고 외칩니다. 소년의 아버지는 무안함을 느끼고 좀머씨가 이상한 사람이라며 지나쳤지만 이 장면에서 소외된 인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저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좀머씨도 책에 담기지 않은 사연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인간이 되었지만 동시에 타인으로부터 소외 당합니다. 어쩌면 좀머씨는 타인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며 사는 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정처 없이 걷는다는 것은 각자 다른 사람들에게 각자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머리를 비우기 위해 걸으면 정신이 맑아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좀머씨는 그저 동네의 이상한 아저씨로 보여지고 회자 됩니다.
책을 읽으며 좀머씨의 고독한 삶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느낌이지만 한편으로 소년의 일상이 주는 풋풋하면서 따스한 느낌이 좋았습니다. 작가인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실제로 은둔형 작가로 수상 기회도 여러 번 거절한 바 있다고 합니다. 작가의 <향수>, <좀머씨 이야기>, <깊이에의 강요>와 같은 작품을 접하며 소외된 인간을 작가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그려냈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도 해서 좋습니다. 지식을 얻는 독서가 삶의 발전을 돕기도 하지만 단순히 마음에 울림을 주는 책읽기도 삶의 큰 자양분이 되어줍니다. 당분간 그때 그때 읽고 싶은 책들을 읽으며 풍요로운 마음이 더 나은 현실을 만드는 선순환을 누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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